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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너는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 <모래군의 열두달> 읽기

<너>는 <내>가 아니다.
또 한 연애가 끝났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이것을 알았다. 처음에 이 말은 ‘너는 왜 내가 되어 주지 못하는 가.’ 라는 원망이었지만. 감정이 잦아들고 난 자리에 마지막으로 남는 가장 고운 잔해는 ‘결국 나도 너일 수 없다.’는 서글픈 인정이었다.

너와 연애를 하면서 나는 내장이 연결된 일체감을 겪었다.
나의 가장 높은 모습과 마찬가지로 가장 낮은 모습도 받아들여진 전체성을 겪었다. 그 황홀이 나는 네가 아니라는 인정을 서글프게 만드는 순간도 있었지만.

하지만 결국은 알게 된다. 네가 내가 아님을 확인하는 고독은 특별하지도 시시하지도 않은, 그저 삶의 조건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너와 나의 경계. 바로 그 곳에서 마찰처럼 삶이 일어난다.
너는 내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삶으로 그 다음 문장을 이어간다.

예를 들어,
'너는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지배할 것이다.' (강호순)
'너는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네가 아닌 내가 옳다.' (이명박)

그런가 하면 알도 레오폴드는 <모래 군의 열두 달>이라는 책을 통해 이런 아름다운 다음 문장을 썼다.
‘너는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너를 알고 싶다.’




너는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흐뭇하다.

레오폴드의 모래 군은 <너>들로 가득하다. 참나무와 소나무, 할미꽃과 드라바, 박새와 기러기, 멧도요, 긴꼬리물새. 그리고 모래 군이라는 땅과 그 땅으로부터 나무로, 새로, 다시 땅으로 순환하는 X와 Y들.

레오폴드의 눈길은 이 모든 <너>에게 오래 머문다. <너>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레오폴드가 즐겨 아는 <너>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너>를 알고자 할 때 삶이 풍성해짐을 느낄 수 있다.

당신의 오늘은 어떤 느낌들로 채워져 있었을까. 피곤해. 맛있어. 긴장 돼. 신선해. 짜증나. 해냈어. 바빠. 공허해.
무수한 느낌의 단편들 사이에서 혹시 흐뭇함도 있었는지 모르겠다.
흐뭇함이란 편안하고 충만한 감정, 귀한 감정이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 당장은 흐뭇하지 않지만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가면 흐뭇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래서 미래의 흐뭇함을 위해 오늘은 도구화된 노동의 긴장을 견디며 사교육비를 벌고 자신이 참아낸 삶은 아이가 보상해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 흐뭇함은 많은 비용이 들며 언제나 유예된다는
속성이 있다.
그러나 레오폴드의 흐뭇함은 어떤 비용도 들지 않으며 지금 여기에 있다.

천개의 도토리 중 단 하나만이 토끼와 맞설 만큼 충분히 성장했다. 나머지는 태어나자마자 초원의 바다에서 익사했다. 이 참나무는 살아남았고 그래서 80년 동안이나 유월의 햇빛을 축적해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흐뭇하다. 80번의 눈보라를 거쳐 내 오두막과 내 영혼을 데우기 위해, 내 도끼와 톱의 도움으로 지금 열이 되어 나오고 있는 것은 바로 그 햇빛이다. 눈보라가 몰아칠 때마다 내 오두막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 연기는 태양이 결코 헛되이 내리쬐지 않았음을 그 참나무를 아는 누구에게나 보여주는 증거다. (p.28)



너는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병들지 않는다.

레오폴드는 나무에게서 나무의 역사를 본다.

빛과 땅으로부터 사람에게 그리고 다시 빛과 땅으로 돌아가는 순환을 본다. 나무를 단지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 존재로 느끼며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토끼와 태양, 그리고 레오폴드 자신이 나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세상 병들의 뿌리에는 고립감이 있다.
존재를 사용가치로만 쓰는 사회에서 너와 나의 경계는 너보다 잘난 내가 되어야 쓰일 수 있다는 압박에 지배 된다. 이 질서 속에서는 성공하는 자도 실패하는 자도 결국에는 외롭다.
공허감을 즉각 현란하게 채워주는 쇼핑, 성매매 같은 친밀감의 상품화, 매체가 제공하는 순간의 스펙터클을 통해, 혹은 극단적인 폭력이나 극단적인 쾌락을 스펙터클로 삼아 삶을 위로받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비가 내려 흙이 물을 머금는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흐뭇한 줄을 아는 이라면,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삶에 흐뭇할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우리 모두 순환하는 전체의 일부이며 세상이 내 관심이 깃들어 나와 연결될 존재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쇼핑도 스펙터클의 구매도 필요하지 않다.
<너>를 아는 일, 연결을 쫓는 일은 이렇게 한 개인이 균형 잡힌 영혼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연결 속에서 존재를 만나는 자세는 당연하게도 존재들 간의 공존에도 도움을 준다.
자식이 말을 안 들어서 속상하다면, 부모가 자기 마음을 몰라줘서 밉다면, 내가 만들어 놓은 새집에 박새가 들지 않아 화가 났다면 홧김에 박새를 쫓아버리기 전에 레오폴드가 박새의 입장에서 바람을 체험한 이야기를 읽어보자
.

박새가 덫 앞에서 하는 행동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아무리 잔잔한 바람이나마 박새가 꼬리 쪽에서 그 바람을 받으며 덫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도록 덫을 놓아보라. 천하의 명마를 모두 동원하더라도 박새를 미끼 쪽으로 끌어당길 수 없다. 덫을 다른 쪽으로 돌려놓으면 괜찮은 성과를 얻을 것이다. 뒤에서 부는 바람은 박새에게는 휴대용 지붕이자 난방장치인 깃털 아래로 차고 습하게 파고든다. (p.123)



너는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나 또한 되지 않겠다.


그리고 레오폴드의 다음 문장은 계속 이어진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지만, 그래서 나는 즐겨 너를 알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네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네>가 될 수 없기에 <나> 또한 되지 않겠다.’

<네>가 될 수 없으니 <너>를 알고 싶다는 것이 <나>의 가능성에 대한 의지라면,
<네>가 될 수 없으므로 <나> 또한 되지 않겠다는 것은 나의 한계에 대한 성찰이다.
 
너 보다 잘난 내가 되는 것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권력은 매력적이다. 권력은 타인을 설득하지 않고도 타인에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이다. 그러므로 권력을 이용해 내게 중요한 것을 위해 너의 중요한 것을 희생시키고도 정당할 수 있는 잘난 척이 가능하다. 레오폴드는 잘난 척에 관심이 없다.
 

시월에 나는 듀베리 낙엽의 붉은 융단 위로 곧고 튼튼하게 솟은 이 파랑 깃털들 사이로 걷는 것을 즐긴다. 나는 이 어린 스트로부스소나무들이 자신의 행복을 아는지 어떤지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행복하다는 것을 안다. (p.118)
그러나 만약 내 농장이 소나무는 많고 자작나무는 적은 훨씬 북쪽에 있다면 어떨까? 솔직히 말해 잘 모르겠다. 내 농장은 여기 있을 뿐이다. (p.99)
사냥감들은 모두 믿을 수 없을 만큼 통통했다. 사슴마다 얼마나 살이 쪘는지 놈들이 허락한다면 등뼈를 따라 움푹 패인 곳에 조그만 양동이로 하나만큼의 물을 부어 담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사슴은 허락하지 않았다. (p.184)



그리고, 내가 아닌 당신에게.

이 외에도 <모래 군의 열두 달>에는 감각을 성실하게 언어화하여
읽는 이의 추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많다. 주장하지 않고 설명하는 글의 미덕을 체험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많은 즐거움 중 하나이다.
나는 아래의 문장을 읽으며 아마도 레오폴드가 주장을 말로 하지 않고 삶으로 사는 사람이어서 이런 좋은 책을 쓸 수 있었나보다 생각하며 즐거웠다.

나는 자연보존론자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글을 읽었으며, 나 자신이 적지 않은 글을 썼다. 그러나 보존론자에 대한 최고의 정의는 붓으로 쓴 것이 아니라 도끼로 쓴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한 사람이 도끼질을 하는 동안 혹은 어떤 나무를 벨까 결정하는 동안 무엇에 대해 생각하는 가의 문제이다. 보존론자는 그가 나무를 찍을 때마다 자신의 땅 위에 자신의 서명을 남기는 중이라는 것을 겸허하게 의식하는 사람이다. (p.97)

나는 내가 아닌 레오폴드를 통해 이런 것들을 알았다. 그리고 내가 아닌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한다.
우리의 연결 중에 이 책도 있었으면 좋겠다.


*글 - 박미숙(생태지평연구소 연구원)




모래 군의 열두달 -그리고 이곳 저곳의 스케치
(sand county almanac, and sketches here adn there)  
알도 레오폴드| 송명규 역| 따님

1991년 미국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은 <환경론자들의 서가>라는 기획을 통해 전세
계 환경관련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을 조사했다
그 결과 레오폴드[Aldo Leopold]의 '모래 군의 열두 달[A Sand County Almana
c]' 카슨[Rachel Carson]의 '침묵의 봄[Slient Spring]' 그리고 월드워치연구
소[Worldwatch Institute]의 '지구환경 보고서[State of the World]'시리즈가차
례로 꼽혔다.

레오폴드 사상 연구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미국 노스텍사스대학 철학과 교수
인 켈리콧[J.Baird Callicott]은 레오폴드를 '환경윤리의 아버지'로 '모래군의
열두 달'을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환경론자들의 바이블'이라고 평가한다.
[모닝365 제공]  


저자 | 알도 레오폴드

1887년 미국 아이오와주 벌링턴에서 태어나 예일대학 삼림학부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1909년 삼림 공부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24년 위스콘신 대학 미국 임산품 시험소 부소장으로 자리를 옮겨 일하다가 1933년 위스콘신대학 농경제학과 교수로 초빙되어 1948년 사망할 때까지 재직했다. 1965년 미국 야생생물연맹의 자연보전 영예의 전당에 들어갔다. [리브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