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예보와는 달리 한주 내내 계속되었던 매서운 추위는 아니었던 1월 15일 아침이었다. 민통선 남방한계선 부근의 야생에 가까운 경관을 본다는 기대감과 그것을 향로봉의 매서운 추위 속에서 봐야 한다는 긴장 등을 품고 나를 포함한 신입연구원들은 손성희 선배와 김동언 선배와 함께 강원도 인제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예정시간 3시간을 조금 넘겨 인제에 도착했다. 굽이치는 산등성이 사이사이로 계단식 밭을 일구며 지형특성에 맞게 살아가는 이 지역 사람들의 모습에서 내가 어렸을 때 살았던 그 강원도의 향취가 느껴졌고 간혹 보이는 군부대와 군인들의 모습에서 군사분계선 부근이란 사실을 새삼 느꼈다.
높은 고개 사이를 몇 번이고 지나간 후 드디어 도착한 인제 한국DMZ평화생명동산. 갈색의 길 다란 단층 건물 여러 동이 조밀하게 늘어선 인제평화생명동산 건물은 향로봉과 어우러져 무척이나 예뻐 보였고 눈에 덮인 그 모습은 마치 쵸코바 위에 새하얀 크림을 잔뜩 뿌려놓은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 생명평화동산 주위의 시설 본 후 전망대에 올라 주위의 경치를 구경했다. 생명평화동산내에 있던 전시용으로 보이는 길 다란 포구를 치켜든 실제 탱크가 인상적이었다.
조금 늦게 도착한 부소장님과 함께 황호섭 선배의 안내로 이번 방문의 주 목적지인 향로봉을 향했다. 향로봉 입구에 도착 후 그 곳을 지키고 있는 군인에게 신분증을 맡기고 향로봉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민통선이 해제 된지 얼마 안 된 지역이란 것을 느꼈다. 향로봉의 굽은 지대를 차로 퉁퉁거리며 들어선 후 본 향로봉의 첫 모습은 사람의 발길이 덜한 지역이라 그런지 자연림이 주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차로 갈 수 있는 한계까지 다다른 후 모두 내려 향로봉을 올랐다. 한국DMZ생명평화동산 부근의 아늑한 날씨와는 달리 고지대의 추운기운을 접하고는 잠깐 풀어놨던 목도리를 단단히 동여 멨다.
겨울산행이기에 눈이 덮인 산주위를 조심히 걸었다. 인간의 간섭없이 자연천이가 진행된 산림은 나름의 오랜 역사를 우리에게 보여주었고 함부로 이곳을 침범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향로봉 골짜기에서부터 내려오는 계곡의 물을 따라서 간혹 보이는 산짐승의 발자국을 보면서 내가 걷고 있는 이 산길 위에 나의 발자국과 산짐승의 발자국이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에 공존의 의미를 되새겼다. 이 겨울 산길 위에 인간의 발자국과 그들의 발자국이 같이 할 수 있다는 것, 그 것을 모두 같이 품을 수 있는 이 향로봉 같은 곳이 많이 있다면 인간은 더 행복해질 것 같았다.
내려오면서 부근 군부대가 조성한 듯 한 휴게시설이 있어 그 주위로 향하였다. 그 곳 바로 옆의 얼어붙은 계곡천 위에 소복히 쌓인 눈 위로 고라니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이 길게 새겨져 있었다. 겨울산을 오르고 내릴 때 산짐승들의 흔적을 자주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산을 덮은 '눈 이불'은 인간과 그들이 같은 곳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알려주는 고마운 존재다. 그들은 자신들의 것보다 기이하게 큰 인간들의 발자국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해졌다. 적이라 생각할까, 아니면 자신들을 묵묵히 지켜보는 무해한 존재라 생각할까...
향로봉에 사는 야생동물의 흔적만을 보다가 그들을 직접 보게 된 것은 하산 후에 차를 타고 산입구로 향하던 중 이었다. 산입구로 향하던 길 위에 갑자기 노루가 나타난 것이었다. 처음에는 대담하게 길가에서 우리와 눈을 마주치고 서 있다가 이내 산 쪽으로 달려갔다. 내가 본 것은 녀석이 산 쪽으로 올라간 후 우리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내고 있던 모습이었다. 겨울 산이라 먹이가 없어 산 밑으로 내려 온 것인지, 아니면 녀석이 평소에도 자주 드나드는 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노루의 모습에서 향로봉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산이란 것을 느꼈다.
다음 날 아침식사 후 1시간 조금 넘게 주차장의 눈을 치우는 노력봉사로 어제 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우리를 편안히 묵게 해준 것에 보답했다. 그리고 어제 어설프게 본 전시관을 전시관 시설 전원을 모두 작동한 후 황호섭 선배의 설명으로 다시 제대로 관람했다. 인제 주위의 희귀하고 아름다운 동식물이 저렇게 많다는 걸 알았고 한반도에서 이 공간을 포기한다면 우리 모두는 환경에 대한 논의를 더 이상 할 자격이 없을 것이라 느꼈다.
60년 넘게 한반도는 적대의 공간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이 적대의 공간에서 유일한 평화지대였던 곳은 가만히 생각해보면 DMZ와 그 부근의 생태계였다. 인간들의 적대적 긴장 속에서도 오히려 그 지역의 생명들은 자연 그대로의 햇살과 바람, 비와 눈을 맞으며 인간의 간섭 없이 60년 동안 평화로운 천이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 간의 적대적 긴장이 낮아지고 평화가 시작된다면 DMZ와 부근 지역의 동식물들의 평화가 깨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60년 동안 생명과 평화의 접경지대였던 DMZ 의 역설적 의미를 말해주는 것 같다.
한국DMZ평화생명동산 내 DMZ전시관 / ⓒ생태지평
전시관 관람 후에 한국DMZ평화생명동산의 현대적이고 오밀조밀하게 잘 꾸며져 있는 숙박시설과 강당, 회의장 등의 시설을 본 후 다 같이 점심을 먹고 집으로 가는 차에 올랐다. 가는 길에 군부대를 지나가던 중 갑자기 어제 본 노루가 생각났다. 노루와 총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역설적 의미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생명과 평화의 접경지대로서의 DMZ를 상상했다.
글 : 김종겸 연구원 / 사진편집 : 오애경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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